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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

책갈피 #4

집으로 돌아와보니 팀장과 정보보호부 박의 메신저가 와 있다.

매크로가 적당히 답을 해주었을테라 쑥 훑어보고 메신저를 닫으려고 했다. 그런데 눈에 걸리는 문장이 보인다. 그것도 박차장과 팀장의 메신저가 모두 그렇다는 건... 왠지 불안하다.

 

이번 주말 낚시 나골프 어때?’

 

박차장은 거의 매주 낚시를 가는 매니아다. 골프는 한두번 스크린을 얘기하긴 했지만 내게 골프라는 단어로 얘길 했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봤다.

 

지난 번에 빌려준 채ㄱ 갖다줄 수 있어요. 이번주?’

 

팀장은 굉장히 학구적인 사람이다. 정확히는 학구적인 사람으로 내가 만들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내가 끊임없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엔 별 관심이 없다가 언젠가부터 자극을 받은 건지 아니면 부장에게 한소릴 들은 건지 틈만 나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책을 빌려달라고 한다. 조심하려고 그럴 때마다 하지만 약간의 우월감이 스며드는 걸 부정할 순 없다. 반말과 존대를 섞어쓰지만 난 상관었다. 빌린 책을 돌려줄때마다 수공예 작품이라는 책갈피를 하나씩 줘서 덕분에 아이들과 와이프,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주곤 했다.

 

네 금요일에 사무실 근무니 그때 갖다 드릴께요.’

매번 고마ㅇ

 

대화창에 있는 몇 개의 문장이 얼핏보면 타이핑을 하다 오탈자를 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대화의 내용을 보니 평소와 달랐다. 재빨리 매크로가 보낸 답변을 확인했다.

 

이번 주말 낚시 나골프 어때?’

 

주말에? 스케줄은 괜찮은 거 같은데.’

 

김차장과 내일 점심 먹어야지.’

 

대화의 주제가 갑자기 바뀌었다.

초창기 챗봇이나 가상비서시스템은 이와 같은 갑자기 바뀐 주제에 대응하질 못했다. 하지만 기계학습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이 정도의 주제전환에서 인텐트(intent, 의도)를 파악해서 대처하는 수준의 프로그램은 중고등학생도 쉽게 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최초 의도로 다시 끌고 오는 것이다.

 

으응. 그런데 어디로 갈 건데?’

 

김차장과 내일점심 안되는 거야?’

 

마치 바둑의 수 싸움 하듯이, 아니, 마치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내가 하고픈 말을 하려는 초등학생처럼 각자 하고픈 말만 하고 있다.

이건 상대방도 매크로같다는 느낌이 든다. 아직 학습이 덜된 매크로.

 

내가 사용하는 매크로는 크게 두가지의 기능으로 나뉜다. 보안영역과 인공지능영역이다. 보안 영역은 회사시스템을 속이는 역할이고, 인공지능 영역은 회사동료를 속이는 역할이다.

현재까진 둘 다 잘 해오고 있다. 느낌상으로 작년말부터 한두 달에 한번씩 이런식의 대화가 오고갔던 것 같다.

문젠 이와 같은 시험을 팀장이 하는 건지, 인사부가 하는 건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제 3의 부서에서 하는 건지 알수가 없다는 거다. 의심은 되지만 팀장에게 이 대화를 팀장이 한 건지 물어볼 수도 없고,

대부분의 비업무적 대화가 그렇듯이 대화를 하고 난 후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사 기억한다하더라도 그건 스스로 만들어낸 기억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나중에 물어본다 한들 내가 그랬어란 경우가 대부분이고, 왜 이말하다 저말 하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처음 내가 저 현상을 발견했을 때는 갑자기 바뀌는 주제에 대한 대답을 적절하게 하도록 하고 원래 주제나 질문으로 돌아가도록 로직을 바꾸려 했다. 이를 위해 기계학습량을 늘리고 각종 SNS에 넘치는 말도 안되는 말대답들의 데이터를 쌓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런 대화가 묻는 말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대화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냥 조금 손보는 수준에서 마무리했었다.

결국 박차장은 장소를 보내주었고 더 이상의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여기야. 누가 소개해주더라고.’

 

보낸답변에는 골프장 위치링크가 덧붙여 있었다. 매크로가 한번 클릭했는 지 위치링크색이 바뀌어 있었다. 박에게 다시 메신저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간을 보니 거의 업무종료시간이다. 일일업무일지가 자동으로 생성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문서작업 : 2시간 11

업무협의 : 2시간 21

메일작성 : 24

메일회신 : 19

리서치 : 1시간 11

기타 : 34

 

기타 시간이 많은 날은 왠지 깨림직하다. 이것도 좀 조정을 해야겠다. 매크로를 실행하는 날엔 기타 시간이 상대적으로 좀 적다는 게 느껴진다.

로그오프를 하고 진짜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간 사무실은 여전히 절반 이상 자리가 비어있다. 자리에 앉아 로그인을 했다. 메일을 확인하는데 감사팀에서 온 메일이 눈에 띈다. 아니나 다를까, 메신저로 감사팀 황차장이 말을 건다.

 

오늘 출근하시는 날이죠?’

 

답을 할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럴 땐 할말을 찾지 못해 어리버리한 나보다 매크로가 나은 거 같다. 머뭇거리는 사이 다시 메시지가 날아온다.

 

몇가지 여쭤볼 사항이 있으니 2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프라인. 어차피 감사팀은 나와 대화를 할 생각도 없고,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다는 걸 알지만. 하긴 메일 쓰는 것보단 메신저 보내는 게 더 편할테니.

업무의 특성상 감사팀과는 가끔 회의를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박은 정보시스템감사 전문가다. 아마 매우 학문적으로 접근을 하려 할 것이다. 1973년 컴퓨터로 허위계좌를 만든 사건에서 비롯된 정보시스템 감사, IT감사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꼭 잘하는 건 아니다.

특히 은행의 감사팀은 아직까지도 압박하고 같은 내용 다섯 번 여섯 번씩 되묻는 수십년 전의 조사방식을 답습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 여러 회사를 다니며 이런일 저런일이 있었기에 감사팀의 패턴은 뻔한데, 주로 백오피스에서 눈에 띄지 않던 황차장이 보자고 하는 게 영 맘에 걸린다.

 

안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 다시 노란색 신용카드를 꺼냈다. 카드형도청기다. 신용카드의 IC칩 부분을 이삼초 정도 눌렀다. 아주 작은 진동이 느껴졌고, 녹음은 기본이고, 위치정보, 그리고 주변에 있는 IoT 디바이스를 감지해서 기록한다. 호주머니에 있던 ROTC 기념반지도 끼웠다. 혹시 몰라 카메라 부분을 다시 한번 바지에 한번 쓱 문지르고 감사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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