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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기

은행열전-헬스장

아침 일찍 회사 헬스장에 가서 가볍게 운동을 하는 건 내겐 큰 기쁨 중 하나다.

뭐랄까.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자기 관리를 잘하는 40대 중년이라는 만족감은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는 나만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무언가가 있다.

 

묘한 경쟁심 때문에 6시부터 오픈을 하는 헬스장은 항상 낯익은 얼굴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이직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회사의 헬스장을 찾는 거였는데, 건물 지하 4층(4층!!!)에 있던 헬스장은 들어서는 순간 어 이게 머지 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굴지의 국내 대기업이고, 신문에 돈 잘 번다고 항상 욕먹는 기사를 도배하는 회사의 헬스장 치고는 너무 볼품이 없없다.

하지만 근처 다른 헬스장에 비하면 싸기도 하고 사물함을 무료(단, 빈 공간이 있을 때)로 주는 거와 아침에 일찍 와서 운동하고 이동 거리없이 바로 출근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바로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아침에 오는 사람들도 눈에 익었고, 돌아가는 매커니즘도 알게 되었다.

재미 있는 몇가지 사실 중 하나가, 아침 일찍 오늘 사람들은 매우 나이가 있거나, 아주 젊은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있는 분들은 조금 오버하면 할아버지 같은 분들도 있어, 아마 운전이나 시설관리 관련해서 별정직처럼 근무하시는 분들 같았고, 젊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몸이 좋았는데, 시큐리티 쪽이 아닌가 싶었다.

 

이삼주쯤 지났을까. 어느날 제일 먼저 온 나는 기분 좋게 러닝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러닝머신은 9대 정도 뿐이었는데 나의 경험치에 의하면 6시 40분이 넘어가면 자리가 없다. 간만에 일찍 와서 한가운데 자리 잡고 난 기분좋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분쯤 뛰고 있었을까.

할아버지 한 분이 바로 내 옆에 올라오더니 전원버튼을 켜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내게

 

"자넨 어디서 근무하나?"

 

라고 말을 건다.

 

하...

반말.

 

난 나이 먹었다고 처음부터 반말 내뱉는 인간을 경멸을 넘어 증오한다.

날 언제 봤다고.

하지만..

 

"아. 네네. 디지털혁신부에 근무합니다."

"근무한지는 오래 되었고?"

"아닙니다. 한달 전쯤 경력사원으로 입사해서요. K증권에서 왔습니다."

"아 그래? K증권 박사장을 내가 잘 알지. 허허"

"아. 네네."

 

그렇게 한 오분간 계속된 대화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그런저런 대화였다.

 

샤워를 하는데 그 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분이 입은 속옷 상의, 민소매 속옷의 상태가...말그대로 오래되 보였다. 색은 깨끗했지만 축 쳐진 옷은 한눈에도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검소함.

은행원의 검소함이 느껴지면서 난 아마도 퇴직을 앞둔 그런저런 분이 아닌가 예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어색한 눈인사로 이어졌고, 성격상 별로 인사를 좋아하지 않던 나는 자연스레 살짝 어긋난 시간을 선택하여 그와의 인연은 자연스레 종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다시 나타난 그는 날 반갑게 보며 오랜만이라도 말을 먼저 건넨다.

시간이 좀 지나선지 나도 별로 거리낌 없이 인사를 했고 별 시덥지 않은 얘길하며 우린 해후의 시간을 채워갔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얼마전부터 함께 운동을 하게된 같은 부서의 B가 다가온다.

 

"오오 차장님. 역시. 라인이 짱짱하셨군요."

"뭐가? 무슨 소리야?"

"H부행장님이 당겨주신거예요? 여기?"

"어? 무슨 소리야, 그게 누군데?"

"헐. 아까 같이 얘기하신 분. 누군지 몰라요?"

 

그는 은행의 두번째 실세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눈빛과 말투에서 풍겼던 그..머랄까...그...게 그거였나 보다.

 

얼마 후 난 그의 얼굴을 TV에서 볼 수 있었다.

국정감사 증인신분으로 나온 자리였는데, 한없이 움츠린 그의 어깨를 보니 그의 축쳐진 민소매 속옷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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