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3
운영모드가 계속되니 난 점차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이제 또 어디로 가볼까라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볼 때쯤 부장이 날 불렀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이제 6년 채워가고 있어요.”
“내년초에 다시 계약이지?”
이런 의뭉스러움은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 네”
“...”
이 침묵은 뭘까. 자기에게 정규직 전환을 부탁했던 다른 사람들과 다른 난 그저 관심이 없어서일 뿐인데. 어쩌면 부장의 머리속엔 이것봐라 올해도 암 소릴 안하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뇌는 이삼년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일을 하고 있던 사이클에서 벗어난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부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머냐고 짜증을 내려는 내 뇌신호와는 달리 온순한 답변이 나와 나도 놀랐다.
“우선 인사부에서 하는 얘길 들어보려구요. 정규직 전환 풀에 들어가는 지도 다시 물어보고”
“풀? 아, 그거야 뭐 내가 상무님이랑 쇼부칠 일이지 머. 풀 그거 소용없어.”
결국 본인에게 달려있으니 빨리 자존심 던지고 애걸하라는 건데. 피곤해진다.
“부장님, 솔직히 제가 뭘 해야할지 좀 답답한 것도 있어요. 이제 나이도 있고.”
“아 그래? 난 자넨 워낙 알아서 잘 하니까 걱정안했는데 그런 게 있었구만.”
하하하하하하. 속으로 웃는다.
나도 내 이런 반응이 재미있다.
“그렇죠. 이게 참. 나이가 드니 누구에게 말하기도 그렇고. 부장님이 편하게 또 이끌어주시니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나오네요.”
“아이고 우리가 벌써 몇 년짼데 그런 소릴해. 나도 뭐 다르겠어. 임원되면 계약직인데.”
하하하하하하. 또 속으로 웃는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저녁, 아니 밤까지 이어졌고 부장은 내게 정보보호부가 모든 걸 빼앗아가기 전에 일을 시작하자고 했다. 내년에 본인이 본부장될 준빈 다 했으니 내후년 따닥으로 상무가 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내년 초에는 가닥이 잡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IT거버넌스를 다시 수립해서 정보보호부가 사용하는 시스템의 총관리권한을 가져오겠다는 것이었다. 정보보호부에서 수없이 찍어내는 갖가지 시스템과 무소불위의 행동에 경종을 울리자는 것이었다.
안그래도 9팀까지 생긴 정보보호부는 제2의 검사실을 넘어 각 팀마다 다른 잣대를 들이대며 을러댔고 사업부서는 보안성심의를 비롯한 갖가지 보고를 하느라 진이 빠지기 일쑤였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업의 호황이 쥐어준 칼자루였다. 증권업에 대출 라이센스를 줄때만 해도 그 동안의 캐시카우를 뺏기게된 은행권의 앞날은 어둡다고들 했고, 특히나 투자상품의 노하우가 전혀 없던 은행은 투자회사들의 포트폴리오 공세로 금새 밀릴거라 생각했지만 고위험 상품인 DLF와 PEF 투자로 인한 서너차례의 이슈는 충성고객들마저 은행을 찾게 만들었다.이제 대출 비즈니스를 하는 증권사래봐야 잔여물량 처리를 위해 최소인원만 운영하는 몇 군데 밖엔 없었다.
3주 후에 실시한 인사부와의 면담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고, 대신 4개월간 난 근처 호텔에서 묵으며 300페이지 정도되는 보고서와 50여장의 요약서를 작성했다. 물론 발표는 부장, 아니 신임 본부장이 했고, 정보보호부의 쉴새 없는 질문에 난 모두 그 자리에서 답을 해주었다.
덕분에 정보보호부의 모니터링방식과 매크로와 유사한 각종 소프트웨어의 아키텍처와 로직을 확인했고, 이러한 소프트웨어 슈팅용 소프트웨어 벤더사의 연락처와 시험버전들이 자연스레 내 개인 노트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리버스엔지니어링에 관한 컨텐츠를 올리는 인도인을 보고,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간 지루하지 않게 매크로와 씨름하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가지고 나간 매크로는 작년 버전이다. 작년에 잠깐 다크웹에서 매크로가 돌았었다. 그건 모두 랜섬웨어가 숨겨져 있던 버전이었다. 재택근무를 하게 된 젊은 직장인 몇몇이 다크웹에서 구입해서 본인들도 쓰고 재판매를 했었는데, 마치 코로나처럼 퍼져나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에서 빨리 파악하여 일찍 종료가 되었었다. 신문에 크게 나진 않았지만 회사들은 정보유출로 인해 곤욕을 치렀고, 사용자들은 대부분 새로운 회사를 찾아야 했다. 이로 인해 매크로의 존재가 알려져 거래시장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나 역시 신문의 가십과 내부 공문에서 젊은 직원들의 갑작스런 대기발령과 인사부와 정보보호부의 시리즈 공문을 통해 내용을 파악했고 매크로를 판매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마약치료모임이 마약거래하기 가장 좋은 장소라는데 은행대표로 반기마다 참석하는 금융정보기술협회야 말로 매크로에 대한 정보를 얻기 가장 좋은 장소였다. 만난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몇몇 사람이 매크로를 사용하고 있는 걸 알게되었다. 테스트용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이미 술자리에 함께했던 몇몇의 머릿속엔 별의별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 세미나에서 만난 윤과 친해지며 난 거의 이십여년만에 개발자가 다시 되었다. 안 풀리는 부분이나 에러코드에 대해 윤에게 물으면 궁금할 법도 한데 아무런 질문없이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만 척척 답변해 주었다. 고군분투하는 업그레이드의 과정은 해외 개발자에게 아웃소싱을 하기가 이렇게 쉽고, 국내 개발자들이 얼마나 정체되어 있나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얻은 경험 덕분에 회사에 해외개발팀을 아예 부서레벨로 운영하자고 제안을 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덕분에 더더욱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 비행기모드를 잠깐 해제하고 메시지 온 게 있는 지 확인했다. 이동할 땐 언제나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유심도 다른 걸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내 로그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닐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주의해야 한다.
뭐 나중에 근무지 이탈로 걸리더라도 이 정도 거리면 담배사러 잠깐 나갔다 온 거라 하면 된다. 핸드폰을 보니 구매자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다
요새 대부분의 구매자들은 중소기업을 다니며 배달이나 근처 두세 시간짜리 단기 아르바이트 하려는 사람들이다. 또,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공기업과 관련된 곳이 대부분이다. 정부에서는 이십인이상 사업장위 경우 필수 재택근무 비율을 정의해두었고 이로 인해 사무실에서 일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중 젊은 친구들이 매크로를 많이 찾고 있다. 공기업의 경우 공무원과 연결되기 너무 쉬워 경기도나 서울이 아닌 지방공무원만을 대상으로 하고, 관계점검도 훨씬 더 세부적으로 해야한다.